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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의 釣行隨想(30) 釣而不網과 不釣勿網 그리고 放生(儒家와 佛家의 입장에서 본 낚시 그리고 放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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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송귀섭 작성일 조회 : 2,778회 댓글 : 0건 18-08-2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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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의 釣行隨想(30)
              釣而不網과 不釣勿網 그리고 放生
            (儒家와 佛家의 입장에서 본 낚시 그리고 放生)

평산 송  귀  섭
FTV 제작위원, 釣樂無極 프로그램 진행
(주)아피스 사외이사, 체리피시 자문위원
<붕어낚시 첫걸음> <붕어 대물낚시> <붕어학개론> 저자


인류의 자연에 대한 권리와 의무
태초부터 인간은 일정량의 자연을 누리고 살 권리를 갖고 살면서 동시에 자연을 보존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살아왔다. 이것이 대자연 속에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하늘이 부여한 원초적인 권리와 의무이다.
또한 대자연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면서 자연보존(自然保存 nature preservation)을 하는 것은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에게 부여한 하늘의 섭리다. 필자가 여기에서 <모든 생물>이라 함은 동물과 식물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살고 있는 각자의 처지에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서로 먹고, 먹히고, 혹은 의존하고 보호하는 상호 작용으로 자연보전(自然保全 nature conservation)을 하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 고귀함과 자연생태계의 섭리(攝理)에 따라 보호(保護 nature protect)하는 것에는 구분과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 保存: 잘 간수하여 남아있게 함, 保全: 잘 지키거나 유지함, 保護: 잘 지키고 보살핌

따라서 낚시 혹은 수렵(狩獵)이나 채집(採集)을 하면서 동물 또는 식물을 취(取)하는 행위는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최소한으로 부여된 권리이겠으나, 자연보전(自然保全)을 위해서 잡은 짐승이나 물고기 중 일부를 방생하고, 산이나 들의 식물을 필요한 만큼만 선별적으로 채집하고 보호(保護)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갖는 의무이다. 그러므로 낚시인이나 산행인이 몽땅 다 취하지 않고 적절히 남겨두는 것이 자연인으로서 성숙된 모습이고, 만물의 영장다운 행동이다.

그럼에도 일부는 대자연의 품속에서 힐링(healing)과 웰빙(well- being)생활을 하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자연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탄을 받기도 하고... 특히 낚시분야는 태초부터 인류가 해 온 생활의 일부임에도 그 호불호(好不好)의 정도가 크고 논란이 많다.
이제 우리가 즐기는 낚시행위와 방생(放生)문제를 중점으로 해서 그 시시비비(是是非非)에 대해 유가(儒家)와 불가(佛家)의 입장을 중심으로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보자.


儒家: 釣而不網 弋不射宿(조이불망 익불사숙)
이 문장은 논어(論語)의 술이(述而)편에 있는 글귀로써 孔子가 가난했던 시절에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낚시나 사냥을 하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述而 7편 26장 子釣而不網, 弋不射宿)
풀이하자면 <공자께서는 낚시는 하되 그물질은 하지 않았고, 사냥은 하되 잠자는 새에게는 주살을 쏘지 않았다.>이다. *주살: 시위 끝(오늬)에 줄을 매어 쏘는 화살  * 간혹은 <弋불사숙>을 <戈불사숙>으로 써놓는 경우가 있는데, 주살 弋(익)자 대신에 창 戈(과)자를 쓴 것이다. 그러나 쏠 射자와 맞는 글자는 주살 弋이고, 창 戈자를 쓴다면 쏠 射(사)자가 아니라 던질 投(투)자를 써야 할 것이다. 창은 활로 쏘는 것이 아니고 손으로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論語는 孔子와 그의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으로써 <子>는 공자(孔子)를 말하며, 모든 글귀 앞에 <子曰>은 孔子 가라사대 즉 말씀을 뜻하고, <子>는 공자의 사상과 품성 그리고 행동을 표현한다. 그러니 여기에서 <子釣而不網, 弋不射宿>의 의미는 공자가 대자연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과 대자연에 대한 윤리적인 보전(保全)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글은 공자의 이러한 사려 깊은 행동에 대해서 후세의 남송(南宋)시대에 홍적(洪適)이 표현해 놓은 것을 주자(朱子)가 논어집주(論語集注)에 정리한 것인데, 이 두 사람은 孔子보다 600여년 후대의 학자이니 홍적이나 주자나 이것이 공자가 말로써 가르친 것인지 그냥 그렇게 한 행동인지를 정확히 보고 들은 바는 아니겠으나 논어에 있는 글귀로만 보고 풀이하자면 이 문장의 <子>가 뜻하는 것은 <공자께서 말하기를, 혹은 가르치기를>이라고 해석하면 안 맞고 <공자께서는>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필자 註)
어떻든 儒家의 聖人인 공자가 선지자(先知者)로서 대자연을 대하는 모습을 나타내주는 이 글귀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점은 대자연을 누리고 사는 인간으로서의 도리(道理)와 살생유택(殺生有擇) 그리고 자연보전(自然保全)과 공존윤리(共存倫理)에 맞는 낚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佛家: 不釣勿網 不戱魚命(부조물망 불희어명)

그렇다면 佛家의 입장이라면 어떠할까? 불가의 입장은 <不釣勿網  不戱魚命>이다. 즉 <낚시질도 하지 말고 그물질도 하지 말 것이며, 물고기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이다. 이는 낚시를 즐기는 행위 자체가 안 된다는 것으로 불가오계(佛家五戒)의 첫 번째 덕목이 불살생(不殺生)으로 살생과 육식을 금(禁)하는 불가에서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五戒: 不殺生, 不偸盜, 不邪淫, 不妄語, 不飮酒

불가에서는 육식(肉食)을 하지 않고 채식(菜食)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취하는 육식과 채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육식은 살생을 하는 것이고, 채식은 살생이 아니라고 하는 논리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인류는 태초부터 육식과 채식을 겸해서 먹도록 진화를 해왔다. 그러니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다는 개념의 살생(殺生)과 식생활(食生活)로써 육식의 개념은 다르다. 살생(殺生)은 사람이나 짐승 따위의 생명이 있는 것을 죽임이라고 사전에 뜻풀이가 되어있는데, 그럼 식물(植物)은 죽여도 괜찮은가? 식물도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채식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살생이지 않는가? 근래에는 식물도 감성(感性)을 갖는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식물 중에는 동물을 사냥하는 감각을 지닌 식충종(食蟲種)도 있다. 그러니 생명존중의 진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구분 없이 세상 만물이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보존(保存)을 따르자면 동물뿐만 아니라 풀 한포기, 씨알 한 낟알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다만 인간이 생존하면서 취하는 최소한의 자연혜택(自然惠澤)은 누리되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여 그 생명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대자연에서 낚시를 즐기는 취미생활은 단순히 물고기의 목숨을 가지고 희롱(戱弄)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에 맞춰서 자연의 일부를 취하거나 즐기면서 대자연의 구성원으로서 타고 난 모습대로 여여(如如 tatahta)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즉 단순한 살생(殺生)이 아니라 자연인 본연의 모습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낚시를 즐기되 물고기 목숨을 가지고 함부로 희롱하는 장난낚시를 해서는 안 되고, 물고기와 어울려서 노니는 조락(釣樂)의 낚시를 해야 한다. * 필자는 오래된 습관으로 붕어와 어울리면서 낚아 올릴 때는 ‘어서 오시게’ 하고 놓아주면서는 ‘잘 가시게’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방생의 道와 禮 그리고 慈悲
유가(儒家)에서는 방생을 인(仁)의 실천이자 생명존중의 도(道)라고 하여 방생을 중요시 했는데, 유교적 방생의 특징은 전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되 자연의 생명에게 예(禮)를 갖추어 취하고 나머지는 정중히 방생을 한다는 것이다.
한편 불가에서는 석탄일(釋迦誕辰日)과 삼월 삼짇날, 정월 대보름날 그리고 8월 보름날에 방생법회를 한다. 일체의 살아있는 생명을 훼손하지 않는 생명존중의 자비덕목(慈悲德目)을 이행하는 것이다. * 다만 시장에 방생법회용으로 잡아다놓고 파는 붉은귀거북(청거북)을 비롯한 생태교란종을 돈 주고 사서 무분별하게 방생이라고 하는 행위는 그것을 자비(慈悲)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가 낚시를 하면서 붕어를 귀히 여기고 방생을 하는 것은 생명존중도 있지만 친하게 대하고 보내주고 싶어서이다. 이 부분에 대해 미국의 낚시인이자 심리학자이며 수필가인 폴 퀸네트(Paul Quinnett)는 <물고기도 우리와 같이 지구에 더불어 사는 동료이기 때문에 다시 보내준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방생을 하려면서 굳이 살림망에 보관해서 입술에 상처가 나고, 지느러미가 닳고, 비늘이 빠지게 해서 방생하는 것은 禮나 慈悲가 아니다. 한 망태 모아서 뿌듯하게 들고 자랑하거나 사진으로 남기고 방생하이 것은 자기만족은 되겠으나 정신없이 낚여 올라온 붕어에게는 살림망에 있는 긴 시간이 고통의 시간이다. 그러니 기왕에 방생을 할 요량이면 낚으면서 붕어와 1:1로 즐긴 후 곧바로 방생하는 것이 좋다. 다만 꼭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은 취하되 일단 취한 물고기는 가치 있게 다루어야 한다. * 폴 퀸네트의 낚은 물고기에 대한 道와 禮: 물고기를 놓아주려면 얼른 놓아주고, 먹으려면 재빨리 확실하게 죽게 하여 고통을 줄여주어야 한다.(저서.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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